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생명의 기원 (루카, 파랄로그, 프리루카)

by 혜 안 2026. 7. 16.

42억 년 전 단 하나의 세포에서 모든 생명이 시작됐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세포조차 시작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2026년 2월 셀 지노믹스에 발표된 논문이 그 전제를 뒤흔들었고, 저는 이 사실을 접하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생명의 기원에 관한 질문이 이렇게까지 깊어질 수 있다는 게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거든요.

 

루카가 최초가 아니었다

당신의 몸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 질문을 진지하게 붙잡고 있으면 꽤 불편해집니다. 교회에선 신이 흙으로 빚었다 하고, 과학 교과서는 42억 년 전 루카(LUCA)라는 단세포 생물에서 모든 생명이 갈라져 나왔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루카(LUCA)란 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 즉 '마지막 보편 공통 조상'을 뜻합니다. 지구상 모든 생명체가 거슬러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단 하나의 세포입니다.

그런데 2024년 네이처 이콜로지 앤 에볼루션에 실린 논문이 이 이야기를 상당히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조회수 40만 회, 인용 횟수 220회, 영향력 지수 18.80에 달하는 이 논문에 따르면 루카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단순한 원시 세포가 아니었습니다(출처: Nature Ecology & Evolution). 게놈 크기는 약 2.5MB, 단백질은 약 2,600개를 보유했고, 완전한 리보솜은 물론 초기 형태의 면역 시스템까지 갖추고 있었다는 겁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최초의 공통 조상이라고 하면 막연히 아주 단순한 무언가를 상상했는데, 2,600개의 단백질을 만드는 존재라니. 루카는 이미 한참 진화가 진행된 결과물이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루카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가 2026년 2월에 나왔습니다.

요약: 루카는 단순한 원시 세포가 아닌 2,600개 단백질과 초기 면역계를 갖춘 복잡한 생명체였으며, 이는 루카 이전의 진화 과정이 존재했음을 시사합니다.

 

파랄로그가 열어준 루카 이전의 문

MIT의 그레고리 등 세 명의 생물학자가 셀 지노믹스에 발표한 논문의 핵심 개념은 파랄로그(Paralog)입니다. 파랄로그란 하나의 조상 유전자가 복제되어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여러 버전으로 갈라진 유전자들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헤모글로빈 유전자가 대표적인 예인데, 산소를 운반하는 이 단백질의 유전자는 인간에게만 여덟 종류가 있고, 이 여덟 개는 모두 약 8억 년 전 하나의 원본 유전자에서 복제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논문이 주목한 것은 모든 생명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파랄로그, 즉 보편 파랄로그(Universal Paralog)입니다. 박테리아에도 있고, 고세균에도 있고, 인간에게도 있는 이 복제된 유전자 쌍이 핵심입니다. 모든 생명체가 루카라는 하나의 세포에서 출발했다면, 복제된 유전자 쌍이 박테리아와 인간 모두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루카가 등장했을 때 이미 그 유전자 복제가 일어나 있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루카 이전에 유전자 복제와 기능 분화가 이미 진행 중이었다는 결론이 됩니다.

논문의 저자는 "보편 파랄로그는 최초의 생명체들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정보다"라고 밝혔습니다(출처: Cell Genomics). 제가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각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과학이 드디어 루카라는 벽 너머를 들여다볼 수단을 손에 쥔 것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루카가 사실상 과학의 지평선이었으니까요.

  • 파랄로그(Paralog): 하나의 조상 유전자에서 복제된 기능 분화 유전자 집합
  • 보편 파랄로그(Universal Paralog): 박테리아·고세균·인간 등 모든 생명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복제 유전자 쌍
  • 이 유전자 쌍이 루카 등장 이전에 이미 분화되어 있었다는 것이 이번 논문의 핵심 발견
요약: 보편 파랄로그 분석을 통해 과학자들은 루카 이전의 진화 흔적을 추적하는 방법론을 처음으로 제시했습니다.

 

프리루카, 설계 없는 진화의 시작

논문이 제시하는 개념 중에 프리루카(Pre-LUCA)가 있습니다. 프리루카란 루카보다 더 이전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생명 형태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아직 실체가 완전히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보편 파랄로그의 존재가 그 흔적을 간접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42억 년 전 지구에는 루카와 동시대에 살던 다른 생명체들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중 루카만이 지금의 모든 생명체로 이어진 후손을 남겼다는 것이 현재 과학계의 추론입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냐면, 생명의 핵심 기능들, 즉 단백질 합성, 세포막을 통한 물질 운반, 유전 정보의 복제 같은 것들이 루카 이전부터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리보솜(Ribosome)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중요합니다. 리보솜이란 세포 안에서 유전 정보를 읽어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분자 기계입니다. 루카가 이미 완전한 리보솜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은, 단백질을 생산하는 이 정교한 시스템이 프리루카 단계에서부터 서서히 형성되어 왔다는 뜻이 됩니다.

제 경험상, 이 부분에서 많은 분들이 "그럼 그 이전에는 누가 만든 거냐"는 질문을 다시 꺼내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논문이 보여주는 그림은 설계자 없이도 화학 반응이 시간을 먹고 스스로 복잡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윈이 1871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따뜻하고 작은 연못에 암모니아와 인산염, 빛, 열, 전기가 있다면 어쩌면 생명이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썼을 때, 그는 증거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향은 맞게 짚었던 셈입니다. 150년이 지나 그 방향이 조금씩 검증되고 있는 중입니다.

요약: 루카 이전의 프리루카 단계에서 이미 단백질 합성과 물질 운반 같은 생명의 핵심 기능들이 설계 없이 진화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번 연구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신화와 과학, 같은 질문의 다른 언어

저는 불교 신자입니다. 그래서 이 논문을 처음 접했을 때 "그렇다면 창조주는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창조론을 두고 거짓말이라고 단정하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수천 년 전 인류가 자신의 몸의 정교함을 보고 느꼈던 그 경이감은 완전히 유효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걸 설명할 언어가 없었을 뿐이었겠죠.

"신이 흙으로 빚었다"는 표현은 거짓이 아니라 당시로선 최선의 번역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 과학은 그것을 탄소 기반 화학 반응으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으로 다시 씁니다. 자연선택이란 환경에 더 잘 적응한 개체가 더 많은 후손을 남기면서 특질이 집단 안에 퍼져나가는 메커니즘을 말합니다. 단어는 완전히 다르지만, 그 배경에 있는 감각, 즉 "우리는 거대한 무언가의 일부"라는 직관은 동일합니다.

칼 세이건의 말처럼 우리는 별의 먼지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창조주보다 40억 년의 시간 동안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스스로를 써내려 간 이 우주의 정교함이 훨씬 더 경이롭다고 느낍니다. 루카의 유전자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세포 안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어떤 창조 서사보다 더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해석입니다. 창조론과 진화론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는 결국 각자가 어떤 질문을 더 소중히 여기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요약: 창조 신화와 현대 과학은 서로 모순이라기보다 같은 경이감을 다른 언어로 표현한 것일 수 있으며,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는 독자 각자의 몫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루카(LUCA)가 최초의 생명체가 아니라면 생명의 시작은 언제인가요?

A. 현재 과학으로는 정확한 시점을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루카는 모든 현존 생명체의 공통 조상이지만, 루카가 등장하기 전에도 이미 단백질을 합성하고 물질을 운반하는 생명 활동이 진행 중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생명의 시작은 특정 순간이라기보다 긴 화학적 과정의 연속으로 보는 시각이 현재 유력합니다.

 

Q. 파랄로그와 오솔로그는 어떻게 다른가요?

A. 파랄로그(Paralog)는 같은 생물 안에서 유전자 복제로 생긴 유사 유전자들을 가리키고, 오솔로그(Ortholog)는 서로 다른 종에서 공통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대응 유전자를 말합니다. 이번 논문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파랄로그이며, 특히 모든 생명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보편 파랄로그가 루카 이전 진화를 추적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Q. 이 논문이 창조론을 완전히 반박하는 건가요?

A. 논문 자체는 창조론을 직접 다루지 않습니다. 창조론을 완전한 허구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저는 수천 년 전 인류가 생명의 정교함에 느꼈던 경이감 자체는 유효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이 그 경이감을 화학 반응과 자연선택이라는 언어로 다시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 경이감 자체를 지우는 건 아닙니다.

 

Q. 셀 지노믹스 논문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2026년 2월에 발표된 해당 논문은 Cell Genomics 저널에 수록되어 있으며, cell.com/cell-genomics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전문은 유료이거나 기관 구독이 필요할 수 있지만, 초록(Abstract)은 무료로 열람 가능합니다.

 

결론

제가 이 내용을 처음 접하고 한참 생각했던 건 "그래서 무엇이 달라지는가"였습니다. 루카가 최초가 아니고 프리루카가 있었다고 해도, 그게 일상에 당장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생명이 어느 날 짠 하고 완성된 것이 아니라 40억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의 우리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은, 저에게는 어떤 창조 이야기보다 더 무거운 울림을 줍니다.

과학이 루카 이전을 들여다보는 방법을 막 손에 쥔 지금, 앞으로 10년 안에 프리루카에 대한 그림이 훨씬 더 구체적으로 그려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과정이 어디로 이어질지, 저는 꽤 기대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셀 지노믹스 원문과 2024년 네이처 이콜로지 앤 에볼루션 논문을 함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Yu3yrnAded0